1992년 12월 유난히도 추웠던 어느 날 밤, 나는 마포대교의 매서운 강바람과 맞서며 여의도의 모 대기업 사옥에 도착했다. 종합상사 맨으로서 부푼 꿈을 안고 입사 최종 면접을 위해 지방에서 전날 올라와서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사전 답사라도 하듯 둘러보기 위함이었다. 그 후 최종 합격하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전 직장인 모 여행사에서 여행인(旅行人)으로서의 인생이 처음 시작됐다.
그야말로 여행(旅行)의 여(旅)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이 나에게 주어졌다. 처음에는 다소 전공과도 멀고, 하고자 했던 종합상사일과도 거리가 있어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본래 천성이 마주하는 사람과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을 모토로 삼았던 터라 일단 열심히 삶에 임했다.
그러던 중 직장에서 아내와 결혼하는 행운도 얻었고, 회사와 업계의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여행업이 나의 인연이었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메마른 삶에 지치고, 영혼도 내팽개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단비와 희망을 안겨주는 여행업이야말로 숭고한 직업이 아닌가라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간직하고 또 주위에 설파하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살아왔었나 보다.
하지만, 최근부터 나는 그토록 사랑하고 애착이 많았던 여행업을 한다는 것에 대해 내적 아노미(Anomie)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대학에서도 학생들에게 그렇게도 자신에 차서 여행업의 숭고함과 여행업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여행인으로 살아갈 것을 권유했던 논리가 이번 학기에는 오리엔테이션에서 잠시 관심을 유도한 것 말고는 학기 내내 꼬리를 내려야했다.
올 한 해를 돌이켜 보아도 제도권내의 관광산업이 어느 곳 하나 녹록한 곳이 없었다. 글로벌 OTA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변변히 대응해 보지도 못한 채 무장해제 당했다. 구태의연한 졸속 저가상품의 구성에 소비자들은 더 이상 여행사에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자유여행의 거대한 트렌드에 인당 수익성에 대한 고민만 하다가 뒤처지고 있다. 뒤늦은 시스템 구축과 단품 구성은 뒷북치기와 경쟁력의 한계에 봉착해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 반복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치적 이유로 인해 일본과 홍콩 등 일부 시장은 개점휴업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대형여행사들의 실적만 보아도 그 충격을 가늠할 수 있다.
과거 IMF와 국제 금융위기 같은 일시적인 위기 현상으로 또다시 여행 호황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양상이 여행업 외적 요인이 아닌 거대한 여행 트렌드의 변화로 봐야 하고 트렌드에 적확(的確)한 대응을 못한 업계에 귀책사유가 있다고 누구나 인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희망과 기대를 동반한다. 첫사랑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가슴에 묻고 살아가듯 여행업을 첫사랑으로 살아왔던 우리는 희망과 기대를 내려놓을 수 없나 보다. 다가오는 2020년에는 토종여행업이 경쟁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OTA들과 대등한 경쟁을 하게 되고, 정치적인 환경도 나아져 일본 등의 시장환경이 개선되며, 상품의 질적 개선을 통해 여행소비자들이 다시 토종여행사를 찾아주고 있다는 뉴스를 희망하고 기대해 본다.
프랑스 파리를 상징하는 문장(紋章)에는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범선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그곳에 적혀 있는 라틴어 ‘플룩투앗 넥 메르기투르(Fluctuat nec mergitur):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라는 말이 새삼 가슴으로 다가온다.
GTN 칼럼
김용동
㈜트래블마케팅서비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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