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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6호 2026년 04월 06 일
  • 1884년 9월17일, 기독교 선교사가 왔다

    특별기고] 장순복 부산관광협회 부회장&대륙항공여행사 대표



  • 취재부 기자 |
    입력 : 2023-01-12 | 업데이트됨 : 3시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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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16대 임금 인조의 장남인 소연세자가 아담 샬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는 중국 포교사에 나오는 아담 샬의 모습

 

 

한국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 호러스 알렌의 부산 도착일자는 1884년 9월 14일이 아니고 9월 17일이다.

 

부산 광복동 롯데 백화점 건너편 쌈지공원에 “기독교 선교사 이곳에 첫발을 딛다”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부산기독교총연합회가 한국교회 100주년과 한국선교 12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다. 표지석에는 초기 내한 선교사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의 얼굴과 함께 그들이 도착한 일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알렌(1884년 9월 14일)의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1885년 4월 2일) 등 초기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첫 발을 디딘 기착지이다.

 

개화&근대화의 계기

 

1890년대 초부터 부산에 정착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은 한국의 개화와 근대화의 계기가 됐다. 선교사들은 교회설립 뿐만 아니라 근대학교, 고아원, 서구식 병원을 설립했고, 자선과 구호활동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또 민족 독립운동, 사회개혁, 여성교육 등 여러 영역에서도 지역 사회발전에 기여했고 근대문명과 민주적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는 안내문은 한국 개신교의 역할과 선교역사를 느낄 수 있다.

 

가톨릭의 한반도 진출은 침략전쟁과의 연대였다.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세스페데스 기념공원은 세스페데스가 한반도에 처음 발을 들인 ‘최초도래지’라는 이유로 조성됐다. 1993년 9월 스페인 정부는 세스페데스 신부 방한 400주년을 기념해 청동 기념비를 기증했다. 2015년 스페인 지도와 세스페데스를 조각한 기념물 등을 만들어 성역화했다.

 

세스페데스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종군 신부로 조선을 침략하는 왜선을 타고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는 왜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참전한 부역자였다. 1593년 12월 27일부터 약 1년 동안 한반도에 머물렀다. 조선과 스페인간의 첫 역사적 접촉, 그리고 한반도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이라는 역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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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가르쳤던 아펜젤러,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주한미국공사관 임시대리공사 전권공사를 역임했던 알렌

 

 

‘금이 많고 살기 좋은 아름다운 나라’

 

우리나라가 코레(Coree)나 코레아(Corea)로 알려지기 전 아랍의 역사서나 지리서는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소개하고 있다. 845년경 아라비아의 지리학자인 이븐 후르다드베가 쓴 “도로와 왕국들에 대한 안내서”에 “중국 동쪽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아홉 명의 왕이 다스리며 금이 많고 살기 좋은 아름다운 나라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모로코 출신의 아랍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는 그곳을 방문한 여행자는 누구나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한다. 그곳이 매우 풍족하고 이로운 것 또한 많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금은 너무나 흔한 바, 그곳 주민들은 심지어 개의 쇠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금으로 만든다고 했다.

 

1654년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니는 ‘타르타르의 전쟁’이라는 책에서 조선은 인삼과 진주가 유명하며 과일들이 많고 그 중에서도 배의 맛이 아주 뛰어나다. 또한 금과 은이 아주 풍부하다고 했다.

 

1667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중국도설’이라는 책이 있다. 책머리 삽화에 왼쪽에 아담 샬, 오른쪽에 마테오 리치가 지도를 들고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제주도까지 뚜렷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중국도설’은 키르허 신부가 썼다. 중국의 언어는 이집트어를 끌어와 그로부터 파생한 상형문자라고 주장했다. 조선이 그 상형문자를 같이 쓰고 있다고 했다.

 

키르허 신부는 아담 샬이 조선 제 16대 임금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담 샬은 본명이 요한 아담 샬 폰 벨이다. 중국 이름은 탕루오왕(湯若望)이다. 독일 출신 예수회 신부로 청나라의 과학기술을 총괄하는 흠천감정(欽天監正)직위에 오른 탁월한 능력자였다. 볼모로 심양까지 끌려갔던 소현세자는 청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게 되는 1644년 9월에 베이징(北京)에 들어가 70여 일을 머물렀다. 이때 아담 샬과 짧지만 매우 긴밀한 인연을 맺게 된다.

 

 

최초의 세례받은 인물=이승훈

 

소현세자가 아담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마치 피로 맺어진 친구처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자연의 어떤 숨겨진 힘이 우리를 이렇게 맺어주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학문에 의해서 연결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석달 앞두고 아담 샬이 기억이 비상한 코레아 환관을 불렀다. 정신이 더 혼미해지기 전에 중국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코레아 환관은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 체계적인 교육을 해달라고 남겨둔 수행원이었다. 코레아 환관은 20여년동안 아담 샬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옆에서 보좌했다. 특이한 운명을 지닌 이 조선인은 누구였을까? 아쉽게도 그 이름과 세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1631년 소현세자보다 먼저 중국 등주에서 조선의 관료와 푸른 눈의 신부가 만났다. 포르투갈 출신 로드리게스 신부와 사신단의 정두원이었다. 로드리게스는 정두원에게 화포와 천리경, 자명종, 그리고 서적 등을 선물했다. 로드리게스는 임나일본부설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일본교회사’라는 책을 썼던 인물이다. 정두원은 귀국할 때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서 오라며 이영후라는 수행원을 신부에게 맡겼다. 이영후는 세례를 받았을까?

 

최초의 세례를 받았던 인물은 이승훈이다. 1784년 베이징에서 루이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조선은 최후의 보루였던 남한산성이 함락당하며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했다. 인조는 땅까지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수향단에 앉아있는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세 번 절하며 아홉 번 머리를 찧었다.

 

사로잡힌 백성들은 떠나는 왕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친명배금(親明排金)의 소용돌이 속에 내팽겨쳐진 소현세자와 세자비 강빈의 죽음은 약물중독과 사약이었다. 아담 샬과 소현세자가 만났던 성당에서 소현세자가 임금이 되었다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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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 8일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의 장례식

 

 

국교 정상화 주장한 박규슈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에서 1875년 강화도 조약까지는 무려 8년이 걸렸다. 일본은 수교를 맺고 싶다고 끊임없이 매달렸다. 조정 대신들은 일본과의 수교를 반대했다. 그 이유는 외교문서에 적힌 중국 황제만이 쓸 수 있다고 여겨졌던 皇(황)勅(칙)이라는 글자 때문이었다.

 

“일본이 황제라고 칭한 것은 주나라 평왕(平王) 시대로부터 이미 수천 년이 됐습니다. 저 사람들이 수교를 하자고 하는데 지금까지 거부당해 왔으니 이러다 문제를 일으킬 구실이 될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국교 정상화를 주장했다. 나라가 부강하면 어찌 오랑캐가 협박을 하겠는가?

 

박규수는 개방의 한복판에 조선을 던져 이를 계기로 힘을 기르는 길을 선택했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미국전권대사 R. 슈펠트 제독과 전권대신 신헌과 부관 김홍집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단 1명의 통역관도 외교관도 없었다.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합의된 14조에 달하는 조약은 이홍장이 협상을 이끌었고 마건충이 문서를 작성했다.

 

1882년 7월 19일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오군란이다. 명성황후 세력 신하들의 반격은 신속했다. 텐진(天津)에 머무르고 있던 김윤식과 어윤중은 중국에 군란 진압을 요청했다. 8월 25일 오장경이 3,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한성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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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이 나가사키에서 태풍을 만나 처음 도착했던 부산항 모습.

 

 

중국으로 납치 당한 이하응

 

8월 26일 조선 최고 권력자 대원군 이하응은 텐진으로 납치당했다. 재집권 33일 만이었다. 8월 30일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 공사관 피습에 따른 피해보상 협상이었지만 일본군 주둔의 빌미를 만든 굴욕적인 조약이었다. 1883년 5월 19일 미국공사 푸트가 조선에 부임했다.

 

7월 16일 미국대통령 아서를 예방하는 보빙사절단(報聘使節團)을 파견했다. 민영익을 사절단장으로, 부대신에 홍영식, 종사관은 서광범을 임명했다. 보빙사절단은 조선 왕국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었던 국가의 운명을 가른 사람들이었다.

 

1883년 11월부터 상하이(上海)~나가사키(長崎)~부산~제물포를 월 2회 운항하는 증기선이 취항했다. 배 이름은 SS.Nanzing이며 한문으로는 남승호(南陞號)로 쓰고 난징호라고 불렀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알렌은 난징호를 타고 부산에 오게 된다. 나는 단신으로 상하이를 떠나 난징호로 한국을 향해 출항했다. 멀미약 브로마이드를 복용하지 않아 배멀미를 심하게 했다. 나가사키와 부산 중간 해상에서 태풍을 만났다. 많은 소선박이 태풍에 휩쓸려 유실됐지만 우리가 탄 난징호는 무사했다.

 

부산은 완전히 왜색도시이다. 도시 변두리로 가지 않고는 조선 사람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일본인은 아주 우아한 백색 건물을 영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서양 사람으로는 부산 세관장 로버트(W.N.Lovatt), 항무관 포스추머스(Posthumus), 레이놀즈(Reynolds)씨, 저지(Jersey)씨, 크로보스(Crobs)씨와 그의 이탈리아인 보조원 등이다. 부산은 북로전선(Northern Telegraphie Lines)과 연결되어 있다. 부산은 훌륭한 항구이다. 그러나 전기가 없고 편의시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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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고종 황제가 알렌에게 수여한 훈장 훈공일등태극대수장

 

 

난징호 타고 상하이에서 출발

 

알렌은 9월 14일 일기에서 상하이를 떠났다. 그리고 부산항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부산에 대한 첫인상을 남겨 9월 14일 부산 도착 또는 그 이전에 부산에 도착해 있었을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난징호의 부산항 입항 기록은 민건호가 남긴 해은일록에 의하면 9월 6, 17, 25일이다.

 

9월 14일은 임금님의 탄신일이지만 그냥 지나갈 계획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9월 14일 부산항에는 입출항 선박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 도착과 상하이 출발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상하이의 선교사가 남긴 편지와 부산항 감리서에서 근무했던 민건호의 해은일록이다.

 

상하이 선교사가 쓴 9월 15일자 편지는 미국북감리교회의 기관지 The Gospel All Lands에 실려 있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의 알렌 박사는 토요일 한국으로 떠났습니다.” 이 편지에 나오는 토요일은 9월 13일이었다. 민건호는 9월 17일 일기에 정오 큰 바람 불고 혹 비뿌림 오늘 난징호가 상하이에서 와서 정박했다.

 

9월 18일 맑음 청나라의 오제독 치제관 참판 심상훈이 난징호를 타고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했고 구검소에서 묵었다. 5시에 난징호가 인천으로 출발했다라고 썼다. 치제관(致祭官)은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죽은 신하를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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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9월 17일 알렌이 부산항에서 만났던 부산해관장 윌리엄 넬슨 로버트 가족사진

 

 

알렌이 남긴 글이 단서

 

청나라 오제독은 임오군란 때 계엄사령관처럼 행사했던 오장경이다. 고종황제는 사당을 세워주었으며 한국 화교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사당 이름이 오무장공사다. 알렌은 9월 14일자 일기에 나가사키와 부산 사이에서 태풍을 만났다고 기록했다. 알렌이 남긴 글모음 속에 태풍이라는 글이 있다.

 

나가사키에서 부산까지 13시간 걸리던 항해를 36시간 만에 도착했다. 태풍을 피하면서 지혜와 용기를 보여준 스코틀랜드 선장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태풍은 혜은일록의 오후에 비가 왔다는 9월 16일자 기록과 큰 바람 불고 혹 비 뿌렸다는 9월 17일 기록과도 일치한다.

 

해은일록은 난징호가 9월 17일 부산항에 도착했으며 9월 18일 제물포로 출항했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표지석에 나와있는 9월 14일을 9월 17일로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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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이 수행했던 초대 주미 사절단이 워싱턴에 있는 조지 워싱턴 초대 미국 대통령 고택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광복전까지 1470명의 선교사 내한

 

1884년 알렌의 입국에서부터 1945년까지 내한한 선교사는 1470명이다. 1470명의 선교사 가운데 미국 국적 선교사는 65%에 달한다. 그 중심에 알렌이 있다. 알렌의 이름은 호러스 뉴톤 알렌(Horace Newton Allen)이며, 한글 이름은 안련(安連)이다.

 

1858년 4월 23일 태어나 1932년 12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그의 아내는 마이애미 의과대학 동급생이었던 메신저(Frances Ann Messenger)이며 1883년 5월 17일 결혼했다. 알렌은 1884년부터 1905년까지 21년간 조선에 머물렀다. 천하의 요충지 조선이 패권다툼의 시련속에 빠져들며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는 격동기였다.

 

알렌은 입국하고 석달만에 갑신정변을 겪는다. 1884년 12월 4일 보빙사절단 부대신 홍영식이 주최하는 우정국 개국 잔치가 있었다. 불이야 하는 고함소리를 듣고 나간 민영익이 문앞에서 칼을 맞았다. 일곱군데나 찔리고 베여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다.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조카로 조선 최고의 권력자였다. 묄렌도르프의 집에서 봉합수술로 민영익을 살려낸 알렌은 석달 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알현한 후 역사의 풍운아가 됐다.

 

알렌은 고종황제가 신임하는 외국인으로 정치적 입지를 넓혀 나갔다. 우리 근대사에 있어서 알렌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다. 조선을 위해 수많은 일을 했고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권과 관련된 사업에 올인했다는 비난도 함께 받고 있다.

 

알렌은 작가였다. 그의 개인적인 경험을 담은 문서들은 구한말 조선사회를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역사책에 없는 삶이 꿈틀댄다. ‘조선견무기’ 등 개인원고를 포함해 3869건의 문서를 남겼다. 100년만에 드러난 대한제국 X파일에는 고위관료 97명의 성격과 장단점을 냉정하게 기록했다.

 

조선에서 체험한 온돌을 열차난방에 적용해 온돌난방객차 특허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등 그의 활약은 종횡무진이다. 1887년 자주외교의 길을 걷게 만들었던 초대 주미사절단과 1893년 우리나라가 최초로 참가한 미국 신대륙발견 400주년을 기념한 시카고 만국박람회 참가단을 수행했다.

 

1904년 고종황제로부터 훈공일등태극대수장(太極大綏章)을 받았으며 1905년 을사늑약 후 미국으로 귀국했다. 그가 받은 훈장은 알렌의 증손녀 리디어 알렌이 2015년 4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증했다.

 

<사진 출처=장순복 대륙항공여행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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