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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고] 화천 백암산에서 ‘금강산을 마주하다'

’민통선 너머, 최초의 케이블카

  • GTN 취재부 기자 marketing@gtn.co.kr
  • 게시됨 : 2022-06-30 오전 11:03:17 | 업데이트됨 : 5시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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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복 부산관광협회 부회장/ 대륙항공여행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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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백암산 케이블카

 

 

‘12578131’. 12578131. 평생 잊을 수 없는 숫자. 필자의 군번이다. 입영열차를 타기 위해 떠나는 버스를 따라오며 한없이 눈물 흘리던 어머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동해안 경비사령부 병참지원부대에서 근무했다. 목욕, 세탁, 군화수리 츄레라를 끌고 휴전선 가까이에 있는 부대를 찾아다녔다. 1976년 여름 동부전선 깊숙이 들어갔을 때 야간에 북한군 트럭 수십 대가 움직인다, 전쟁이 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시야 확보를 위해 미루나무 절단 작업을 시작했다. 북한군 소위 박철이 당장 작업을 중단하라며 윽박질렀다. 미군이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하자 몽둥이로 무장한 북한군 20여 명이 들이닥쳤다. “저 간나새끼들 다 조지라우” 고함소리와 함께 미군과 한국군, 민간인 노무자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놀란 노무자들이 도끼를 버리고 도주했다. 흥분한 북한 병사가 도끼를 주워들고 미군 장교 두 명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쳤다. 비무장지대에서 미군이 그것도 장교 두 명이 희생된 엄청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 본토에서 전술폭격기 20여 대, 괌에서 B-52 폭격기 3대가 날아왔다. 오키나와에서 온 F-4 팬텀 전투기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며 응징 보복 작전 지시를 내렸다. 국군 최정예 부대 제1공수특전여단에서 차출된 64명이 미 육군 공병대를 따라 비무장지대로 진입, 8월 21일 오전 7시 미루나무를 절단했다. 카투사로 위장했던 64명의 특전사 요원들이 완전무장 한 뒤 북한군의 바리게이트와 초소를 두들겨 부수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던 일은 박희도 장군의 회고록에 남아있다.

 

8.18 판문점 도끼만행 사태로 첫 휴가가 3개월 뒤로 밀리는 바람에 투덜투덜했던 당시 상황은 준전시였다. 우리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북·중 방위조약의 핵심은 상대방이 어떤 나라 또는 연합군의 무장 침공을 받아 전쟁상태가 될 경우 다른 한쪽은 전력을 다해 군사와 원조를 제공한다는 부분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진핑(習近平:습근평) 중국 주석은 2018년 3월부터 15개월간 다섯 차례나 만나 양국 관계가 역사적 새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선언했다. 중국이 한국 편에서 북한을 움직여 줄 것이라는 착각을 던져버려야 한다. 1965년 6월 북베트남 군복으로 갈아입은 중국인민해방군이 비밀리에 베트남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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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댐

 

 

1973년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32만 명을 베트남에 보냈다. 북베트남 지원은 1980년대 중국 예산의 4년간 국방비와 맞먹는 액수였다. 3억m의 옷감과 3만여 대의 차량, 수백km에 달하는 철로와 침목을 포함한 기관차와 객차, 500만t의 양식, 연료 200판t 외에 수억 달러를 지원했다.

 

중국은 1882년 임오군란을 빌미삼아 병자호란 후 약 250년 만에 2,000명의 중국군을 서울에 주둔시켰다.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를 감국대사로 파견했다. 정치적 목적과 더불어 다양한 경제적 이권을 챙기는 중국의 속성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중국의 객관적 실체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10월 25일은 중국의 항미원조 기념일이다. 미국과 대항하는 혈맹, 조선을 지원하고 가정과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출전하였다하여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명칭은 항미원조 지원군이었지만 정규군을 파병했다. 1950년 6·25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은 인천상륙작전은 0.02%의 확률로 성공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할 수 있었다. 평양과 원산을 점령한 뒤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1950년 10월 26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9월 15일 이었으니 한 달 보름 만에 통일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곧바로 동쪽으로 진격해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했더라면 북한군 주력부대의 퇴로를 차단해 전쟁을 끝낼 수도 있었다. 맥아더는 해군수송선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원산 상륙작전을 진행했다. 10월 25일이었다.

 

그사이 남쪽의 북한군은 태백산맥을 따라 후퇴했다. 함경남도 함흥에는 북한 땅에 세워진 유일한 외국 지도자 동상이 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중국 총리 동상이다. 1976년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김일성 지시로 건립했다. 1979년 9월 동상 제막식 때는 김일성이 직접 참석했다. 김일성이 휴전 후 북한에 주둔하던 25만 중국군의 철수를 요구하자 1958년 북한을 방문해 직접 철군을 발표했다.

 

1961년 7월에는 베이징(北京:북경)을 방문한 김일성과 북·중 우호 협력 상호원조조약에 서명했다. 이런 고마움 때문에 동상을 세운 것이다. 미국 제33대 대통령 트루먼은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UN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중국 주재 인도대사 파니카를 통해 워싱턴에 알렸다. 미국 정부는 이 경고를 가볍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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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 산소길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웨이크섬(북서 태평양에 있는 환초섬)에서 만났다.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국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다.” 맥아더는 한국의 전황을 장밋빛으로 그리며 소련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했다.

 

트루먼은 비행기 타기 전에 맥아더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1950년 3월 30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스탈린은 남침을 허락하면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동의를 받도록 했다. 5월 13일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났다. 마오쩌둥은 만약 미군이 참전하면 군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김일성은 ‘파병할 필요가 없다. 미국은 중국에서도 싸우지 않고 물러가지 않았느냐, 참전할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며 승리를 자신했다.

 

9월 28일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가 다시 올라가던 날 김일성은 노동당 정치국 전체회의를 열고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의했다. 10월 3일 파병을 원한다는 김일성의 친서를 든 박헌영이 마오쩌둥을 만났다. 김일성의 친서는 베이징 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10월 8일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참전을 통보했다.

 

10월 10일 저우언라이는 흑해의 소치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스탈린을 만났다. 스탈린은 소련 공군력을 투입하여 중국을 지원할 수 없다고 했다. 소련공군은 11월 초부터 압록강 상공에 나타나 미군과 교전했다. 소련과 미군은 공중전을 벌이면서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확전을 피하기 위한 암묵적인 양해였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압록강을 건너가 김일성을 만났다. 촌에서 키운 닭 한 마리와 반찬 몇 개 놓고 점심을 함께했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지도층과 인연을 가지게 되었고 펑더화이와는 친한 사이였다. 마오쩌둥은 대만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쑹수룬(宋時輪:송시륜)을 불렀다. 황포군관학교 5기생인 쑹수룬은 타고난 전략가였다. 매복과 기습에 일가견이 있었다. 15만 대병이 11월 7일과 12일, 19일 세 차례에 걸쳐 야밤에 압록강을 건넜다.

 

21일 새벽 장진호 주변 지역에 매복했다. 장진호는 한반도의 등뼈인 태백산맥 고원지대에 있다. 좁은 산길의 보급로는 우회로가 없었고 언제라도 적에 의해 끊길 수 있었다. 근처에 철도도 없었다. 사령관 쑹수룬은 미 해병대를 가둬놓고 전멸시킬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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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 정자

 

한국군과 함께 북진 중이던 미군은 중국군 대부대가 코앞에 올 때까지 몰랐다. 15만 중국군이 미군 정찰기에 단 한 번도 발각되지 않은 것은 전쟁사에 남을 기적이었다. 11월 24일 맥아더는 또다시 총공세를 명령했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다는 희망으로 언론들은 크리스마스 공세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제10군단 해병 1사단 스미스 사단장은 예리한 판단력을 지닌 지휘관이었다. 쾌속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헬기를 타고 장진호 일대와 개마고원의 험준한 산세를 돌아본 뒤 포위를 시도할 만하다고 확신했다. 장진호 인근 하갈우리에 수송기가 내릴 수 있는 활주로를 건설했다. 체감온도가 영하 50도까지 곤두박질치는 추위 속에서 50cm 아래까지 얼어붙은 땅을 파 내려갔다.

 

군단장 아몬드가 “이런 곳에 왜 비행장을 만드느냐”며 스미스 사단장을 질타했지만, 비행장을 완공시켰다. 중국군이 파괴한 황초령 수문교에 일본에서 공수한 조립 다리를 놓아 병력과 장비가 지나갈 수 있도록 했다. 홍해를 가르는 모세의 기적과 견줄만하다는 평을 받았다.

 

“미 10군단을 전멸시켜라. 한 명도 남기지 마라. 상대를 전멸시키면 우리 병사 한 명만 남아도 우리가 승리한 거다.” 마오쩌둥은 총사령관 펑더화이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1950년 11월 27일 새벽 공격이 시작됐다. 사방에서 피리, 꽹과리, 나팔 등 온갖 괴상한 소리와 함께 총알과 포탄이 날아들며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살인적 추위 때문에 무기가 얼어서 소변으로 녹이려고 하면 소변도 그대로 얼어붙었다. 동상에 걸린 병사 다리는 톱으로 잘랐다. 교전에 따른 사망자보다 얼어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살을 에는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17일간 혈투 끝에 포위망을 뚫었다.

 

중국은 장진호 전투를 대대적 승리라고 선전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100주년을 기념해 사상 최대 제작비를 들여 장진호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경계 자세로 얼어 죽은 채 발견된 100여 명의 중국군은 얼음조각 중대로 불리며 전쟁 영웅으로 예우하고 있다.

 

지옥불 계곡이라 불리는 23km 계곡에서 미 해병 2,500명이 전사하고 5,000명에 이르는 부상자가 나왔다. 장진호에서 쑹수룬과 격돌한 스미스 사단장은 정전체결 후 이렇게 말했다. 장진호 일대는 군사행동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칭기즈칸도 정복할 엄두를 못 낼 그런 곳이었다. 병력 15만을 잠복시켜 우리를 포위한 쑹수룬은 무모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대 전략가였다.

 

미 해병 1사단의 후퇴는 “역방향공격”, “바다를 향한 전투 행군”으로 불린다. 트루먼 대통령은 역대 최고의 전투라고 치하했다. 오만해진 맥아더의 치명적 오판 때문에 유엔군과 한미연합군은 벼랑으로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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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

 

맥아더는 도쿄(東京:동경)에서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워커 8군 사령관, 아몬드 10군단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미8군의 후퇴와 10군단의 흥남 철수를 승인했다. 1951년 1월 4일 중국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수원까지 밀려들었다.

 

1월 13일 UN은 휴전결의안을 통과시켰다. 4일 뒤 중국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중국이 이 제안을 거부한 것은 한반도에서 미군을 완전히 밀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만약 중국이 휴전안을 받아들였다면 저토록 아름다운 서울은 북한 땅이 되었을 것이다.

 

1월 25일 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중국군이 일주일 이상 연속 작전 능력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대규모 공세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3월 15일 서울을 수복하고 전선을 38선 위쪽으로 밀어 올렸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가슴에 수류탄이 달린 공수부대 복장으로 유명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는 낙하산을 타고 적진에 뛰어내린 용감한 군인이었다. 미8군 전 장병에게 보낸 훈령은 감동이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라는 주제로 쓴 그의 글은 가슴을 울리는 서사시였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전투는 계속되었다. 화천은 그 중심이었다. 가창리와 화악산, 파로호 전투와 백암산 전투는 6·25 전쟁의 잔혹사로 남았다. 파로호는 중국군 1개 사단을 초토화시킨 대승을 거둔 곳이다.

 

한미연합군이 중장비를 동원해 중국군을 대붕호에 수장시킨 역사가 어린 호수다. 대전과를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현장을 방문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라는 휘호를 내렸다.

 

강원 화천의 민간인 통제선 북쪽에 백암산(1,178m)이 있다. 6·25전쟁 이후 민간인은 감히 접근할 수 없었던 백암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케이블카 덕분이었다. 케이블카와 상·하부승강장 전망대 공사는 끝났고 편의시설 공사가 한창이었다.

 

백암산 케이블카는 여러 대의 케빈이 순환하는 곤돌라 형식이 아니라 45인승 케이블카 2대가 함께 움직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8월부터 운행을 시작한다. 예약정보로 민통선 출입 신청이 이뤄지므로 하루 전까지 인터넷 예약을 마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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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먹다리

 

화천군은 산천어 축제로 대박을 터트렸지만, 한겨울을 빼고는 관광객을 불러들일 방도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관광객을 불러들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끝에 금강산과 금강산댐을 바라볼 수 있는 백암산 꼭대기에 케이블카를 놓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2006년 케이블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화천군은 끈질기게 군부대를 설득했다. 논의과정만 3년이 걸렸다. 2009년 용역조사가 시작되었고 2012년 착공을 할 수 있었다. 시작하자마자 공사가 중단됐다. 백암산 계곡에서 천연기념물 제216호 사향노루가 발견된 것이다.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받았다. 그렇게 또 2년을 보냈다. 2014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8년이 걸렸다.

 

군용차량이 아니면 드나들 수 없는 길들을 포장하고 군진지를 가로지를 수밖에 없는 구간은 또다시 군부대를 설득하며 길을 닦아나갔다. 한국전력의 지원 거절로 지자체 예산으로 전봇대를 하나하나 세워나갔다.

 

진짜 고난은 케이블카 설치였다. 군사적 긴장 때문에 단 한 번도 헬기를 띄우지 못했다. 산꼭대기까지 화물 삭도를 설치 시멘트와 자재를 운반했다. 통제구역을 통과한 민간인이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일출 이후부터 일몰까지다. 인부들은 매일 백암산 정상까지 오르내렸다. 힘들기도 하지만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고심 끝에 인력 삭도를 설치 공사를 마무리했다.

 

백암산 케이블카가 운행을 시작하면 파로호를 유람한 후 평화의 댐 선착장에서 백암산 케이블카를 다녀올 수 있게 된다. 화천은 ‘화천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거례리 수목공원’, ‘북한강 산소길을 걷다 보면 만나는 숲으로 다리’, ‘평화의 댐과 비목공원 그리고 평화의 종’, ‘한국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꺼먹다리’, ‘부산 출신의 부부 가수가 펼치는 음악공연을 볼 수 있는 해와달 카페’ 등의 볼거리가 있다. DMZ 중동부 최전방 접경지역 화천은 북한강이 흐르고 전 지역의 86.2%가 산지다. 깨끗하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화천이 안보관광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글&사진=대륙항공여행사/ 051)463-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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